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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본디지는 일본의 역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즉 일반적으로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와 에도 막부 시기의 형벌에 관한 그림들이 일본 본디지의 원류로 보고 있다.
일본 전국시대의 고문 , 예컨데 화형, 신체절단형, 목마형(木馬刑), 참형 등의 형벌들은 잔학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에 에도막부(江戶幕府:1742년)에 이르러 형법에 근거하여 형벌의 종류를 제한하였는데, 그 속에 여죄수에 대한 새우묶기, 매달기 고문술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현대 본지디의 모티브를 제공하였다.
[일본형벌사(日本刑罰史)]란 책에 따르면 여죄수의 처형은 남성 구경꾼들의 변태성욕을 불러왔다고 한다.
여죄수에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온갖 고통을 가했던 역사가 현대 일본 본디지의 주된 주제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여기에다 당시 성행했던 각종 포박술 또한 현대 일본의 본디지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일본 본디지의 실질적인 기원은 20세기 초반의 伊藤晴雨(이토 세이유:1882~1961)란 인물이다.
그는 풍속고증가로서 고문에 관한 그림이나 결박 그림을 전문으로 그렸으며, 직접 모델을 고용하여 본디지 사진을 찍기도 하였는데, 이는 후에 『責め絵の女 伊藤晴雨写真帖』으로 출판되기도 하였다.
그는 1953년 한 잡지의 논문에서 “나는 1908년부터 긴박(緊縛)에 대해 연구하였는데, 유일하게 얻은 것이라곤 변태성욕자란 낙인 뿐이었다”라고 자신의 심경을 밝힌 적있다.
이로 볼 때 1950년대 만하더라도 본디지가 일본 사회에서 비정상적이고 변태적으로 비춰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讀切 Romance』라는 B급 색정소설 잡지에 많은 본디지 사진이나 화보가 실렸는데, 이 잡지의 편집자인 上田青柿郎은 伊藤晴雨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자술하고 있다.
이들 사진들은 후에 『奇譚俱樂部』,『裏窗』등의 SM잡지가 생기는데 큰 역할하였다.
이로볼 때 伊藤晴雨는 일본 SM의 직접적인 효시라고 할 수 있다.
『裏窗』은 1955년에 탄생하였는데, 처음에는 소설만을 연재하다가 대략 1960년에 SM잡지로 변모하였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奇譚俱樂部』의 전임 편집자인 飯田豐一의 노력 때문이다.
그 는 후에 가장 주된 투고자가 되었고, 승사(繩師)인 濡木痴夢男과 함께 70~80년대 SM잡지의 황금기(예를 들면 《SM Collector》、《SM Select》、《SM Kitan》、《SM Mania》、《SM Fan》、《SM Sniper》、《SM King》등)를 열었으며, SM의 영역을 영상물인 비디오로 넓혔다.
각 SM 잡지의 특성에 따라 본디지의 예술적 표현에 미묘한 차이가 있었는데, 이를 간단하게 설명하긴 어렵다.
단 이들 잡지의 공통점은 모두 여성의 주제였다는 점이다. 일본의 본디지에는 두 가지 조류가 있다.
즉 미학적인 것을 중시하는 것과 경박하면서도 색정적인 것이다.
주목할 것은 団鬼六이 소설 『花與蛇(꽃과 뱀)』을 쓴 후 여성의 성기를 부각시키기 시작하였으며, 이 시기로부터 진동기나 관장(灌腸) 등이 본디지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현재 일본의 본디지는 여성의 성기와 에널, 음부(陰部) 등 수치스런 부위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본디지에서는 없었던 부분이다.
이처럼 현대 일본의 본디지는 성행위의 전주곡인 전희의 하나로 변질되어 미학적인 것을 중시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진정한 본디지 예술이 아니라 할 수 있다.
★ 전후 일본 본디지에서는 John Willie 등을 필두로 하는 서구 본디지의 영향을 받아 라텍스 혹은 가죽을 소재로 한 아래와 같은 형식의 본디지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본디지는 그 기원을 에도시대로 보기도 하는데, 결국 현대 본디지의 원형은 伊藤晴雨(이토 세이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지금은 갈수록 일본의 전통적인 본디지를 고수하기 보다는 서양적 현대적인 아이템을 많이 첨가하여 볼거리 위주로 나가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세월이 흘러 후배들이 우리 나라의 본디지 역사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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