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이 블로그에 유사한 내용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만, 내용을 조금 더 추가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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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SM 문화는 다양한 형태의 표현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역사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본 SM의 확립은 여자 죄수 류를 주제로 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오닌의 난(應仁之亂)*이후 센고쿠(戰國) 시대와 에도(江戶) 시기에서 메이지(明治) 시기에 이르는 형벌 그림을 가리킨다.
* 오닌의 난(應仁之亂) : 일본 교토(京都) 지역에서 일어난 내란(1467~1477년)으로서 백년 간의 기나긴 센고쿠 시대(戰國時代:1490~1590년)의 계기가 되었으며, 이 난을 계기로 장원제도가 무너지고 대영주인 다이묘(大名)가 부상하게 되었다.
센고쿠 시대의 고문 방식은 잔혹하기로 유명하다.
즉 화형, 신체절단형, 묵형(문신), 석포주(石抱柱 : 무거운 돌을 무릎 위에 올려 놓은 형벌), 온천열탕형벌, 목마(木馬) 태우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방법들이 동원되었는데, 각지에서 야심을 가진 다이묘들이 할거하던 센고쿠 시대라는 혼란의 시기가 이처럼 비인간적인 여러 가지 징벌적 고문이 성행하게 하였다.
에도 막부가 1742년에 공포한 형법에 근거하면 일곱 가지 형벌(사형, 추방, 노예형, 체벌, 자유형, 노역형, 벌금형)과 네 가지 고문(태형, 石抱*, 밧줄로 묶기, 거꾸로 매달기)이 있었다.
이 가운데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에도 시대의 네 가지 고문술인데, 이는 오늘날 일본 SM 문화의 주된 전형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현재 일본 SM 문화의 뿌리를 이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 시기 형벌의 또 다른 측면은 공개적인 모욕이다. A.D 794년 야마토(大和) 왕조가 나라(奈良)에 건립되기 전에 범죄자를 공개적으로 모욕하거나 공개적으로 형을 집행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었다.
단 여자 죄수에 대한 형집행을 절대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는데, 에도(江戶) 시기에 이르러 이러한 원칙이 무너졌다.
瀧川政次郎의 [日本行刑史]에 따르면 죄인을 결박하여 말에 태운 후 글로써 그 죄행을 적은 다음 마을을 한 바퀴 돌게 했다고 한다.
瀧川政次郎은 특히 여자 죄수에 대한 형벌은 남성 구경꾼으로 하여금 변태성욕을 불러일으키게 했다고 지적하였다. 여자 죄수를 공개적으로 모욕한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주고, 한편으로는 죄인에게 최대한 수치를 주고자 함이었다.
여자 죄수를 공개적으로 모욕함으로써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이러한 행위들은 현대 본디지 예술을 지배하는 주제가 되었다.
에도 막부의 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쓰나(德川家綱)와 5대 쇼군인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 이후 도쿠가와 막부 시기의 일본사회는 비교적 안정되었으며, 형벌 행위 또한 더욱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즉 에도 문화 절정기의 형벌은 일종의 풍속으로 변질되었고, 대중을 선동하는 오락적 색채를 띠게 되어 대중들 속으로 널리 퍼져나갔는데, 현대 SM의 문화적 특징, 특히 여성과 본디지의 기원은 멀리 이 시기에 비롯되었다.
당시의 징벌 및 형의 집행은 거의 대부분 비교적 낮은 단계에서 행해졌다.
에도 시대의 범인 체포는 ‘與力’, ‘同心’ 등의 전문 하급 관리들에 의해 행해졌는데, 일본 본디지는 이들 ‘同心’들에 의해 발전되고 전해졌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본 SM의 확립은 여자 죄수 류를 주제로 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오닌의 난(應仁之亂)*이후 센고쿠(戰國) 시대와 에도(江戶) 시기에서 메이지(明治) 시기에 이르는 형벌 그림을 가리킨다.
* 오닌의 난(應仁之亂) : 일본 교토(京都) 지역에서 일어난 내란(1467~1477년)으로서 백년 간의 기나긴 센고쿠 시대(戰國時代:1490~1590년)의 계기가 되었으며, 이 난을 계기로 장원제도가 무너지고 대영주인 다이묘(大名)가 부상하게 되었다.
센고쿠 시대의 고문 방식은 잔혹하기로 유명하다.
즉 화형, 신체절단형, 묵형(문신), 석포주(石抱柱 : 무거운 돌을 무릎 위에 올려 놓은 형벌), 온천열탕형벌, 목마(木馬) 태우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방법들이 동원되었는데, 각지에서 야심을 가진 다이묘들이 할거하던 센고쿠 시대라는 혼란의 시기가 이처럼 비인간적인 여러 가지 징벌적 고문이 성행하게 하였다.
에도 막부가 1742년에 공포한 형법에 근거하면 일곱 가지 형벌(사형, 추방, 노예형, 체벌, 자유형, 노역형, 벌금형)과 네 가지 고문(태형, 石抱*, 밧줄로 묶기, 거꾸로 매달기)이 있었다.
이 가운데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에도 시대의 네 가지 고문술인데, 이는 오늘날 일본 SM 문화의 주된 전형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현재 일본 SM 문화의 뿌리를 이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 시기 형벌의 또 다른 측면은 공개적인 모욕이다. A.D 794년 야마토(大和) 왕조가 나라(奈良)에 건립되기 전에 범죄자를 공개적으로 모욕하거나 공개적으로 형을 집행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었다.
단 여자 죄수에 대한 형집행을 절대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는데, 에도(江戶) 시기에 이르러 이러한 원칙이 무너졌다.
瀧川政次郎의 [日本行刑史]에 따르면 죄인을 결박하여 말에 태운 후 글로써 그 죄행을 적은 다음 마을을 한 바퀴 돌게 했다고 한다.
瀧川政次郎은 특히 여자 죄수에 대한 형벌은 남성 구경꾼으로 하여금 변태성욕을 불러일으키게 했다고 지적하였다. 여자 죄수를 공개적으로 모욕한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주고, 한편으로는 죄인에게 최대한 수치를 주고자 함이었다.
여자 죄수를 공개적으로 모욕함으로써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이러한 행위들은 현대 본디지 예술을 지배하는 주제가 되었다.
에도 막부의 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쓰나(德川家綱)와 5대 쇼군인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 이후 도쿠가와 막부 시기의 일본사회는 비교적 안정되었으며, 형벌 행위 또한 더욱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즉 에도 문화 절정기의 형벌은 일종의 풍속으로 변질되었고, 대중을 선동하는 오락적 색채를 띠게 되어 대중들 속으로 널리 퍼져나갔는데, 현대 SM의 문화적 특징, 특히 여성과 본디지의 기원은 멀리 이 시기에 비롯되었다.
당시의 징벌 및 형의 집행은 거의 대부분 비교적 낮은 단계에서 행해졌다.
에도 시대의 범인 체포는 ‘與力’, ‘同心’ 등의 전문 하급 관리들에 의해 행해졌는데, 일본 본디지는 이들 ‘同心’들에 의해 발전되고 전해졌다.
M 문화에는 공권력에 대한 풍자적 요소가 들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어떤 그림들을 예로 들면 반동가문의 처자를 고등경찰이 강간하고 고문하는 장면이 보이고, 에도 시기의 그림에도 여죄수가 관리들에게 수치를 당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백화점의 남자 직원이 물건을 훔치던 여성을 추행하는 장면, 부정 차표를 사용한 여성을 역장이 강간하는 장면 등, 이러한 그림들은 고문과 강간을 정당화하고 피해자를 범죄자화하고 있어 성적학대 색채가 농후하다.
비록 피해자들이 두려움과 수치로 떨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의 범죄에 대한 응징을 수긍하고 있다.
그림에서 보여지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이처럼 취약하였다. 여성의 연약함과 무력함 등을 특징으로 묘사하는 그림들이 잠차 늘어감에 따라 이른바 사디스트들의 욕망을 자극하였는데, 그 결과 본디지 예술에도 이러한 심리가 반영되기에 이르렀다.
이토 세이유(伊藤晴雨)
“나는 1908년부터 본디지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 얻은 것이라곤 고달픔과 변태성욕자라는 낙인 뿐이었다”
이는 1953년 이토 세이유(伊藤晴雨)가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 있는 말이다.
이토 세이유는 일본 현대 본디지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그가 살았던 그 시대에는 SM이 공개적이지 못했으며 에세머들은 비정상 혹은 변태로 간주되었다.
즉 이를 다르게 말하면 1950년대 만하더라도 본디지가 일본 사회에서 비정상적이고 변태적인 행위로 비춰졌다는 것이다.
이토 세이유가 1950년대 초에 이러한 글을 기고할 때는 염가의 잡지가 쏟아져 나와 동양적 색채의 색정 잡지 시장이 확대되고 있었다.
1953년 당시 수많은 염가 잡지 중의 하나였던 “奇譚クラブ(Club)”은 이른바 진정한 변태 잡지였다.
奇譚クラブ은 1948년 창간되었는데, 원래는 일반적인 색정 내용을 다룬 잡지였다. 그러던 중 오사무 노무라(喜多玲子)가 그린 일련의 본디지 그림 때문에 SM 경향을 띤 잡지로 변화되었다.
奇譚クラブ
오사무 노무라와 奇譚クラブ 및 裏窓(Uramado)의 편집자인 수마 타시유키(須磨利之), 그리고 소설가인 美濃村晃(필명)은 동일인인데, 스스로 이토 세이유의 마지막 제자라고 한 사람이다.
“ 読切ロマンス(Romance)”는 B급 색정소설을 위주로 한 잡지였다.
이 잡지에는 많은 본디지 사진 및 그림이 실렸는데, 편집자인 上田青柿郎이 직접 그리고 촬영한 것들이다. 그는 이토 세이유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이토 세이유의 사진 촬영회에 항상 참석했었다.
많은 촬영회를 통해 생산된 본디지 사진들은 奇譚クラブ이나 裏窓 등의 SM잡지의 간행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다.
裏窓은 1955년애 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시대적 배경의 소설을 게재하였다. 그러다 1960년경에 SM잡지로 바뀌었는데, 이는 奇譚クラブ의 전임 편집장인 飯田豊一의 노력 때문이었다.
飯田豊一은 [奇譚クラブ]의 가장 중요한 투고자였는데, 飯田豊一은 본디지 마스터로 더 유명한 누레키 치무오(濡木痴夢男: 히로키 류이치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Bakushi에서 본디지 마스터로 출연한 바 있음)의 필명이기도 하다.
飯田豊一, 즉 누레키 치무오(濡木痴夢男)는 1970년대에 일본 SM 잡지의 황금시대를 맞는 토대를 닦았으며, 아울러 뒤이은 SM 비디오의 발전을 불러왔다.
누레키 치무오(濡木痴夢男)
飯田豊一의 기획과 노력으로 裏窓은 일본에서 가장 평범하지 않은 SM잡지로 불렸으며, 吉田久、藤澤修 등의 천재 촬영가와 예술가 나카가와 아야꼬(中川彩子)를 길러 내었다.
이 밖에도 Phoenix社의 도움으로 해외의 사진과 그림들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Phoenix 社의 森下高茂는 일찍이 미국에서 SM 방면의 전문가들, 예컨대 John Willie, Fakir, Musafar(세계 최초로 창간된 신체개조 잡지인 Fancy의 발행인) 등과 접촉하기도 하는 등 해외와의 교류도 시도하였다.
이 후 SM잡지는 70년대초부터 80년대에 이르러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어 수많은 잡지, 예컨대 SM Collector、SM Select、SM Kitan、SM Mania、SM Fan、SM Sniper、SM King 등이 창간되었다.
많은 SM잡지들간 차이점, SM 예술 표현 속의 미세한 차이 등을 일반인에게 설명하기 쉽지 않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여성이 희생물이 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일본 SM에는 대략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조류가 있다.
하나는 비애와 학대가 어우러진 어두운 미학적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다소 경박한 색정적인 표현이다.
특기할 것은 단 오니로쿠(团鬼六)가 [꽃과 뱀(花と蛇)]이란 소설을 쓴 후 여성의 음부 묘사가 뚜렷해졌으며, 이 시기를 시작으로 진동기나 관장 등이 SM의 영역 속으로 들어왔다는 점이다.
단 오니로쿠(团鬼六)
현재 일본의 본디지는 여성의 성기와 에널, 음부(陰部) 등 수치스런 부위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본디지에서는 없었던 부분이다.
이처럼 현대 일본의 본디지는 성행위의 전주곡인 전희의 하나로 변질되어 미학적인 것을 중시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진정한 본디지 예술이 아니라 할 수 있다.
★ 전후 일본 본디지에서는 John Willie 등을 필두로 하는 서구 본디지의 영향을 받아 라텍스 혹은 가죽을 소재로 한 아래와 같은 형식의 본디지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본디지는 그 기원을 에도시대로 보기도 하는데, 결국 현대 본디지의 원형은 伊藤晴雨(이토 세이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지금은 갈수록 일본의 전통적인 본디지를 고수하기 보다는 서양적 현대적인 아이템을 많이 첨가하여 볼거리 위주로 나가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세월이 흘러 후배들이 우리 나라의 본디지 역사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해 본다.
이상 절학무우의 잡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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