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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7일 금요일

일본 긴박(緊縛) 약사(略史)




일본에서 SM 문화는 다양한 형태의 표현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역사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본 SM의 확립은 여자 죄수 류를 주제로 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오닌의 난(應仁之亂)* 이후 센고쿠(戰國) 시대와 에도(江戶) 시기에서 메이지(明治) 시기에 이르는 형벌 그림을 가리킨다.



* 오닌의 난(應仁之亂) : 일본 교토(京都) 지역에서 일어난 내란(1467~1477)으로서 백년 간의 기나긴 센고쿠 시대(戰國時代:1490~1590)의 계기가 되었으며, 이 난을 계기로 장원제도가 무너지고 대영주인 다이묘(大名)가 부상하게 되었다.




센고쿠 시대의 고문 방식은 잔혹하기로 유명하다.

즉 화형, 신체절단형, 묵형(문신), 석포주(石抱柱 : 무거운 돌을 무릎 위에 올려 놓은 형벌), 온천열탕형벌, 목마(木馬) 태우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방법들이 동원되었는데, 각지에서 야심을 가진 다이묘들이 할거하던 센고쿠 시대라는 혼란의 시기가 이처럼 비인간적인 여러 가지 징벌적 고문이 성행하게 하였다.



에도 막부가 1742년에 공포한 형법에 근거하면 일곱 가지 형벌(사형, 추방, 노예형, 체벌, 자유형, 노역형, 벌금형)과 네 가지 고문(태형, 石抱*, 밧줄로 묶기, 거꾸로 매달기)이 있었다.



이 가운데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에도 시대의 네 가지 고문술인데, 이는 오늘날 일본 SM 문화의 주된 전형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현재 일본 SM 문화의 뿌리를 이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 시기 형벌의 또 다른 측면은 공개적인 모욕이다. A.D 794년 야마토(大和) 왕조가 나라(奈良)에 건립되기 전에 범죄자를 공개적으로 모욕하거나 공개적으로 형을 집행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었다.



단 여자 죄수에 대한 형집행을 절대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는데, 에도(江戶) 시기에 이르러 이러한 원칙이 무너졌다.



瀧川政次 [日本行刑史]에 따르면 죄인을 결박하여 말에 태운 후 글로써 그 죄행을 적은 다음 마을을 한 바퀴 돌게 했다고 한다.



瀧川政次은 특히 여자 죄수에 대한 형벌은 남성 구경꾼으로 하여금 변태성욕을 불러일으키게 했다고 지적하였다. 여자 죄수를 공개적으로 모욕한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주고, 한편으로는 죄인에게 최대한 수치를 주고자 함이었다.



여자 죄수를 공개적으로 모욕함으로써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이러한 행위들은 현대 본디지 예술을 지배하는 주제가 되었다.



에도 막부의 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쓰나(德川家綱) 5대 쇼군인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 이후 도쿠가와 막부 시기의 일본사회는 비교적 안정되었으며, 형벌 행위 또한 더욱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즉 에도 문화 절정기의 형벌은 일종의 풍속으로 변질되었고, 대중을 선동하는 오락적 색채를 띠게 되어 대중들 속으로 널리 퍼져나갔는데, 현대 SM의 문화적 특징, 특히 여성과 본디지의 기원은 멀리 이 시기에 비롯되었다.



당시의 징벌 및 형의 집행은 거의 대부분 비교적 낮은 단계에서 행해졌다.

에도 시대의 범인 체포는 ‘與力’, ‘同心’ 등의 전문 하급 관리들에 의해 행해졌는데, 일본 본디지는 이들 ‘同心’들에 의해 발전되고 전해졌다.



SM 문화에는 공권력에 대한 풍자적 요소가 들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어떤 그림들을 예로 들면 반동가문의 처자를 고등경찰이 강간하고 고문하는 장면이 보이고, 에도 시기의 그림에도 여죄수가 관리들에게 수치를 당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백화점의 남자 직원이 물건을 훔치던 여성을 추행하는 장면, 부정 차표를 사용한 여성을 역장이 강간하는 장면 등, 이러한 그림들은 고문과 강간을 정당화하고 피해자를 범죄자화하고 있어 성적학대 색채가 농후하다.??



비록 피해자들이 두려움과 수치로 떨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의 범죄에 대한 응징을 수긍하고 있다.



그림에서 보여지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이처럼 취약하였다. 여성의 연약함과 무력함 등을 특징으로 묘사하는 그림들이 잠차 늘어감에 따라 이른바 사디스트들의 욕망을 자극하였는데, 그 결과 본디지 예술에도 이러한 심리가 반영되기에 이르렀다.



 



이토 세이유(伊藤晴雨)



 

“나는 1908년부터 본디지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 얻은 것이라곤 고달픔과 변태성욕자라는 낙인 뿐이었다”



이는 1953년 이토 세이유(伊藤晴雨)가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 있는 말이다.



이토 세이유는 일본 현대 본디지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그가 살았던 그 시대에는 SM이 공개적이지 못했으며 에세머들은 비정상 혹은 변태로 간주되었다.

즉 이를 다르게 말하면 1950년대 만하더라도 본디지가 일본 사회에서 비정상적이고 변태적으로 비춰졌다는 것이다.



이토 세이유가 1950년대 초에 이러한 글을 기고할 때는 염가의 잡지가 쏟아져 나와 동양적 색채의 색정 잡지 시장이 확대되고 있었다.



1953년 당시 수많은 염가 잡지 중의 하나였던 “奇譚クラブ(Club)”은 이른바 진정한 변태 잡지였다.



奇譚クラブ은 1948년 창간되었는데, 원래는 일반적인 색정 잡지였다. 오사무 노무라(喜多玲子)가 그린 일련의 본디지 그림 때문에 SM 경향을 띤 잡지로 변화되었다.







奇譚クラブ



 



오사무 노무라가 그린 본디지 화보





오사무 노무라와 奇譚クラブ 및 裏窓(Uramado)의 편집자인 수마 타시유키(須磨利之), 그리고 소설가인 美濃村晃(필명)은 동일인인데, 스스로 이토 세이유의 마지막 제자라고 한 사람이다.



切ロマンス(Romance)”는 B급 색정소설을 위주로 한 잡지였다.

이 잡지에는 많은 본디지 사진 및 그림이 실렸는데, 편집자인 上田青柿郎이 직접 그리고 촬영한 것들이다. 그는 이토 세이유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이토 세이유의 사진 촬영회에 항상 참석했었다.

 





読切ロマン




많은 촬영회를 통해 생산된 본디지 사진들은 奇譚クラブ이나 裏窓 등의 SM잡지의 간행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다.



裏窓은 1955년애 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시대적 배경의 소설을 게재하였다. 그러다 1960년경에 SM잡지로 바뀌었는데, 이는 奇譚クラブ의 전임 편집장인 飯田豊一의 노력 때문이었다.








裏窓 (1957 7월호 표지)





飯田豊一은 [奇譚クラブ]의 가장 중요한 투고자였는데, 飯田豊一은 본디지 마스터로 더 유명한 누레키 치무오(濡木痴夢男: 히로키 류이치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Bakushi에서 본디지 마스터로 출연한 바 있음)의 필명이기도 하다.  
飯田豊一, 즉 누레키 치무오(濡木痴夢男) 1970년대에 일본 SM 잡지의 황금시대를 맞는 토대를 닦았으며, 아울러 뒤이은 SM 비디오의 발전을 불러왔다.







누레키 치무오(濡木痴夢男)





飯田豊一의 기획과 노력으로 裏窓은 일본에서 가장 평범하지 않은 SM잡지로 불렸으며, 吉田久、藤澤修 등의 천재 촬영가와 예술가 나카가와 아야꼬(中川彩子)를 길러 내었다.  
이 밖에도 Phoenix社의 도움으로 해외의 사진과 그림들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Phoenix 社의 森下高茂는 일찍이 미국에서 SM 방면의 전문가들, 예컨대 John Willie, Fakir, Musafar(세계 최초로 창간된 신체개조 잡지인 Fancy의 발행인) 등과 접촉하기도 하는 등 해외와의 교류도 시도하였다.



이 후 SM잡지는 70년대초부터 80년대에 이르러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어 수많은 잡지, 예컨대 SM CollectorSM SelectSM KitanSM ManiaSM FanSM SniperSM King 등이 창간되었다.



많은 SM 잡지들간 차이점, SM 예술 표현 속의 미세한 차이 등을 일반인에게 설명하기 쉽지 않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여성이 희생물이 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일본 SM에는 대략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조류가 있다.

하나는 비애와 학대가 어우러진 어두운 미학적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다소 경박한 색정적인 표현이다.



특기할 것은 단 오니로쿠(鬼六) [꽃과 뱀(花と蛇)]이란 소설을 쓴 후 여성의 음부 묘사가 뚜렷해졌으며, 이 시기를 시작으로 진동기나 관장 등이 SM의 영역 속으로 들어왔다는 점이다.

 





단 오니로쿠(鬼六)



현존하는 일본의 SM 클럽들은 두 번째 조류의 산물로서 음부, 항문 등 여성의 은밀한 부위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전통적인 SM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결코 치중하지 않았다.



시대적인 조류와 대중의 요구에 따라 SM은 성행위 전주곡인 전희의 일종으로 변질되었고, 미학의 추구는 중시 받지 못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자연스런 성행위 자체를 터부시할 필요는 없지만, 성행위 자체가 SM의 한 부분은 아니라는 점도 알아야 한다.



현재 유행하는 SM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SM이라 할 수 없다. 이는 본디지에서 추구하는 미학적 가치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은 본 절학무우가 아키타 마사미(秋田昌美) [일본긴박사진사(日本緊縛寫眞史)]를 절록하여 번역한 것이다.





위 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의 본디지는 일본의 역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며, 일본 센고쿠(戰國) 시대와 에도(江戶) 시대에 성행했던 각종 포박술 등이 현대 일본의 본디지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 본디지의 실질적인 기원은 20세기 초반의 伊藤晴雨(이토 세이유:1882~1961)란 인물이다.



그는 풍속고증가로서 고문에 관한 그림이나 결박 그림을 전문으로 그렸으며, 직접 모델을 고용하여 본디지 사진을 찍기도 하였는데, 이는 후에 사진첩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또한 1950년와 1960년대에 쏟아져 나온 SM잡지는 모두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토 세이유의 地獄 표지와  地獄図絵 일부(좌로부터)





따라서 일본의 현대 본디지의 시원은 이토 세이유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한마디로 말해 지금의 일본은 전통적인 본디지를 고수하기 보다는 서양적 아이템을 많이 첨가하여 볼거리 위주로 나가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세월이 흘러 우리 나라의 본디지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해 본다

[이상의 글은 제 블로그에 있는 기존의 글을 보충하여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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